<나의 금잔디 동산>
-가계
구상 시인은 할아버지가 울산 부사였고, 큰아버지들은 창녕 현감, 현풍 군수를 지냈고, 아버지 구종진도 궁내부 주사로 있었다. 외할아버지도 백두 진사(과거에 급제는 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은 사람)였다. 아산이씨 집안인 외가는 전통적인 천주교 집안으로 구상 시인의 아버지도 결혼과 함께 천주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구상 시인에게는 원래 형님이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가톨릭 신부가 되셨고, 또 한분은 동경 유학 중 동경 대지진 때 행방불명되었다. 형이신 구대준 신부는 광복 후에도 북한에 머물며 포교 활동을 벌이다가 1949년에 공산당에 잡혀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출생과 성장
구상 시인은 아버지가 쉰, 어머니(이정자)가 마흔넷의 나이였던 1919년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 집에서 지어 준 이름은 구상준이다. 그런데 「상」이라는 외자로 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고,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돌림자인 ‘준' 자를 떼고 불렀기 때문이다. 구상 시인이 태어난 곳은 서울 이화동이다. 그러나 그는 네 살 때 북한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독일계 가톨릭 성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서 원산시 근교인 덕원이라는 곳으로 가서 자랐다. 부친은 원산 교구에 가서 해성학원을 설립하고 원장을 지내셨다. 그때 생활의 우스운 예를 하나 들면, 여덟 살에 보통 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등교 첫날 그의 옷차림이 전교 어린이의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소학교생 양복에다 란도 셀을 메고 갔는데, 이것이 아이들의 눈에는 우체부로 보여 단 하루 만에 그의 별호가 되었다. 그래서 그 이튿날부터는 한복차림으로 나서는데 어머니가 우겨서 목세루 두루마기를 입고 책보를 들고 갔더니 이번에는 나이 어린 신랑 같다고 '알 서방'이라고 놀려댔다.
<주의자 구상>
1. 신학교 중등과 시절과 대학시절
구상 시인은 열다섯에 가톨릭 신부가 되고자 베네딕도 수도원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3년 만에 환속을 했고, 일반 중학으로 진학했으나 퇴학당했다. 마을에서는 주의자가 되었다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당시 속칭 주의자란 말은 사상가라는 뜻보다는 그 사람 버렸다는 뜻이 농후한 것이었다. 이쯤 되고 보니 구상 시인은 몸 둘 곳도 없어 고향을 떠나 노동판 인부노릇도 하고, 야학당 지도도 하다가 마침내 먼 유랑의 길을 떠난 것이 동경이다. 동경으로 간 구상 시인은 처음 몇 달 동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급 노동자로, 또는 연필공장 직공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선배의 권유로 일본대학 종교과와 명치대학 문예과에 시험을 쳐 두 군데 모두 합격하였는데, 그 가운데 선택한 것이 종교과였다.
2. 아버지의 유훈과 형의 교훈
구상 시인의 한평생 삶의 지칭이 되고 좌우명이 된 말씀이 아버지의 유훈과 형의 교훈이다.
아버지의 유훈
아버지는 바로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구상을 불러 앉히시고는 "너는 매사에 기승을 하지 말라! 아무리 외롭고 바른 일이라도 기승을 하면 위해를 입느니라.” 하시면서 채근담을 손수 펼쳐 짚어 보이신 것이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감성일푼편초탈일푼 "조금 줄여서 사는 것이 조금 초탈해 사는 것이니라".
형의 교훈 절망의 극한적인 상황 속에 있던 20대의 구상 시인에게 가톨릭의 신부였던 형에게서 그 어느 때 글월을 받았는데 거기 적혀 있는 것이 바로 아시시프란체스코 성인의 말씀으로 "하느님께서 너에게 내려주신 모든 은혜를 도로 거두어 도둑들에게 나누어 주셨더라면 하느님께서는 진정한 감사를 받으실 것을……." 이였다.
-원산 문학가 동맹과 응향 필화사건
구상 시인이 일본 동경에서의 학생 생활을 끝낸 것은 1941년이었다. 귀국 후 구상 시인은 북한 함흥에 북선 매일 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1946년 초 원산의 문학도들은 북로당이 각 직업 동맹과 더불어 직능 단체 조직에 나서자 그 일환으로 원산 문학가 동맹을 발족했다. 구상 시인은 신문 지면이나 동인지에 작품 발표를 하고 있었으므로, 문맹에 자동적으로 일원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조직 사업이나 선전 행사는 일체 외면하고 원산 여자 사범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무렵 구상 시인은 ‘원산 문예총'의 위원장으로부터 해방 기념 시집 발간에 작품을 제출해 달라는 간곡한 청탁을 받았다. 아무리 공산당 치하지만 해방 후 첫 시집이라는 그 의의와 문학 동인들과의 우애도 있고 해서 <여명도>, <길>, <밤> 등의 작품을 제출했는데 그 시편들이 시집《응향》의 권두에 실렸다. 그 시집의 장정은 이중섭이 맡았는데, 표지 그림은 군동상(群童像)이었다. 즉시 북한의 신문과 방송은《응향》을 규탄하는 결정서라는 것을 발표하는 동시에 현지 원산을 비롯한 각 지방 동맹에 총체적인 검열 사업을 벌일 것을 공고하였다. 그리고 저들이 가장 문제의 대상이요, 공격의 대상은 구상 시인의 시편들 이었는데, 그것은 구상 시인의 시 자체가 그들의 눈으로서는 예술 지상 주의적일 뿐 아니라 이미 출신 성분이나 행동거지가 반동적이었기 때문이다. 백인준이라는 자의 논평에 의하면 퇴폐 주의적이며, 악마 주의적이요, 부르주아적이요, 반역사적이요, 반인민적이요, 등등 도합 7개의 수식이 붙은 죄목이었다. 그 필화를 입고 1947년 2월에 탈출 월남하였다. 월남한지 한달 남짓, 그 《응향》사건은 남로당계 문학가 동맹의 기관지 제3호에 대서 특필 전재 보도되었고, 이에 대하여 민족진영에서 김동리씨를 비롯하여 조연현, 곽종원, 임긍재씨 등이 반론항의에 나섰다. 구상 시인은 최태응씨가 편집하던《해동공론》에 ‘북조선 문학 여담'이란 제목으로 사건의 경위를 발표하게 되었고, 당시 우익진영의 유일한 문학지인《백민》에 <발길에 채운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와>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서울 문단에 입참하게 되었다.
-고마운지고 반려인생
구상 시인의 부인 서영옥 여사는 젊어서부터 아픈 남편을 간호한 수호천사와 같은 여인이었다. 구상 시인이 생전에 건강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의 덕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상 시인의 부인은 그의 형님이 주임 신부인 흥남 천주교회 경영의 대건 의원에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부인과 구상 시인의 약혼이 설왕설래 되고 있을 무렵, 구상 시인은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니 결혼이고 뭐고 할 단계가 아니었다. 구상 시인은 마식령에 있는 교회 소속 산장에 전지요양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약혼녀에게 모든 것을 절연한다는 통고문을 내었다. 그리고는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덕원 집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서영옥 여사는 구상 시인을 찾아 나섰는데 서로 길이 어긋난 것이다. 사고가 난 것이 아닐까 걱정하고 있는데, 그녀가 기진맥진하여 들어섰다. 그때의 반가움과 감격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결혼하게 된다. 폐결핵이 두 번째 발병한 것은 1948년 월남 후 1년만 이었다. 이때가 구상 시인에게는 병과 가난에 몰린 제일 어려운 시기였다. 병원에 입원했으나 치료비, 입원비를 낼 길이 없었다. 이런 경제적인 암담함은 오히려 병세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여기서 부인은 한 방법을 생각해 냈으니 그것이 곧 마산 교통요양원의 취직이었다. 말하자면 자기는 의사로 가고 구상 시인은 환자로 입원을 시키는 계획인데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성취하였다. 이때에 잊지 못할 일은 진주에 사는 설창수 시인으로부터의 우애다. 입원비 등에 몰려 누워서도 가시방석에 올라앉은 것 같은 어느 날, 진주에서 인편 하나가 왔는데 내놓는 것을 보니 설창수 시인의 편지와 상당 액수의 위문금과 두루마리에 정성스럽게 쓴 모금취지문과 그 갹출자 명단이었다. 그 발기문에는 "해당화 피는 원산에서 공산당들에게 시를 쓴 죄로 결정서와 박해를 받고 월남 탈출하며 사고무친한 자유 남한에서 해당화 같은 피를 쏟으며 고독하게 쓰러진 시인 구상을 구출하자." 라는 황송한 내용이었고, 갹출자들은 진주의 민족진영 각계의 지도층과 문화인들이었다. 이것을 인연으로 구상 시인과 설창수 시인은 결의형제가 되었으며, 구상 시인은 진주의 개천예술제에 매년 참가하였다. 동란 이후 대구 피난처에서 각혈을 하고 두 번이나 병원 신세를 졌다. 그때마다 부인은 직업을 갖기도 하고 개업도 하였는데, 마침내 구상 시인의 정양처를 구하여 개업한다는 것이 시골집 왜관이 되었다. 그래서 왜관 집에는 살림집과 병실(혹은 서재, 혹은 사랑) 방 두 칸의 독채를 지어놓고 관수재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이것은 부인이 언제나 마음 놓이지 않는 구상 시인을 위해 지은 정양소인 것이다.
-대구매일 피습사건
1955년 천주교가 경영을 맡게 된 대구매일신문 상임고문을 맡게 되었다. 그러자 얼마 안가서 한국 언론사상 특기할 정치 폭도들의 대구매일 피습사건이 터졌다. 주인공은 최석채 주필로서 그분이 쓴 장관 지방순시 환영에 학생 동원을 비판한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이 현지 여당 측의 비위를 건드려 국민회 경북본부 에서는 그 정정과 필자의 해임을 요구하면서 이에 불응할 경우에는 실력행사를 한다는 통고였는데, 최 주필의 의기도 의연했고, 교구본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와 사장 임화길 신부의 소신도 결연하여서 이를 일축했다. 그래서 결국 당시 국민회 경북본부가 지휘하는 테러단이 9월14일 대낮에 신문사를 습격해 인쇄기를 비롯한 기물들을 모조리 때려 부수기에 이르렀다. 구상 시인은 이 사건에 경향(京鄕)을 오르내리면서 국회 증언도 직접하고, 또 사태수습의 노력도 하였는데, 그것을 끝낸 후 동아일보에 기고한<민주창망>이라는 칼럼에 ‘민주주의는 여론정치를 본령으로 삼는다. 그래서「런던타임즈」의 어느 주필은 내가 한번 붓을 들어 그 비위를 밝히면 영국 내각은 3일안에 도괴를 면치 못하리라고 장담했다.(중략) 그런데 이번 대매사건의 귀결을 판정승 이라고들 하나 나 자신도 자위하고 있지만 이것을 치르고 나서 나는 여론 정치의 확립이 그 얼마나 창망한가를 더욱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라고 썼다.
<5.26 제1차 정치파동과 육군참모총장의 훈령>
-육군참모총장의 훈령
구상 시인이 무등병으로 종군하면서 본 군인들의 일화 가운데 1952년 5ㆍ26 제1차 정치파동 때 육군본부 참모진의 동태 하나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이 군인을 동원하여 등원하는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납치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육군본부에서는 곧 참모회의를 열어 그 불법성에 반대하기로 결의하고 육군참모 총장 명의로'육군 장병에게 전하는 고함'이라는 훈령을 작성하여 각 부대 지휘관에게 시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략 현하와 같은 정치 변동기에 승하여 군의 본질과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고 정사에 관여하여 경거망동하는 자가 있다면 건군역사상 불식할 수 없는 일대 오점을 남기게 됨은 물론 누란의 위기에 있는 국가의 운명을 일조에 멸망의 심연에 빠지게 하여 한을 천추에 남기게 될 것이니 제군은 국가의 운명을 쌍견에 지고 조국 수호의 본연의 사명에 염념 명심하여 일심불란 헌신하여 주기 바란다 하략." 그런데 지금 읽어도 의연하고 당당한 명문으로써 이 문안 작성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박정희 중령이었다. 물론 이것을 외면으로만 보면 군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는 명분을 앞세운 거사요, 행동이었으나 돌이켜보면 군인들에 의한 우리 정치의 불법과 횡포에 대한 최초의 반기요, 항거로써 역사적 의의를 지닌 사건이라고 보고 있다. 이때 구상 시인은 국방부 기관지를 맡고 있었고, 이종찬 장군을 비롯해 여러 참모들과 친교를 가지고 있어, 이장군의 그 심각한 고민상을 목격했으며, 특히 이용문, 김종평 장군의 의기나 기개의 장함에 감복했다고 한다. 구상 시인은 동란 중 무등병 복무가 인정되어 1955년 민간인으로서 금성화랑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한국전쟁과 구상>
-무등병 시절
구상 시인은 일찍 우리 국군과 관련을 맺게 된다. 1949년 초 육군정보국에서 ‘문화단체 총 연합회'에 대북심리전 요원을 요청해와 당시「연합신문」 문화부장으로 있던 그가 추천되었다. 구상 시인은 육군정보국 제2과 (즉 HID)에서 북한의 진상을 폭로하는「북한특보」의 편집책임을 지고 있었고, 한편 북한으로 비밀히 보내지는 「봉화」의 제작을 맡았다. 「봉화」라는 지하신문은 해외 및 남한의 뉴스와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 등을 편집하여 4ㆍ6배판으로 사진 축소해서 비밀루트를 통해 북한에 살포 된 것이다. 1950년 6ㆍ25전쟁으로 인해 대구로 후퇴하였으며, 그때부터 정훈국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가 맡은 일은 대적(對敵)전단(傳單)을 비롯해 우리 장병들에게 보내는 국내외 소식과 전투 상황과 그 전과를 마치 신문의 호외처럼 만들어 보내는 인쇄물의 편집 제작이었다. 이 인쇄물의 제호를 '승리'라고 붙였으며, 이것이 수복 후 국방부 기관지가 된「승리일보」의 시초였다. 「승리일보」는 수돗물보다도 더 기다려지는 생명수 바로 그것이어서 1ㆍ4후퇴까지 서울은 「승리일보」일색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1ㆍ4후퇴로 다시 내려간 대구에서 「승리일보」의 피난 보따리를 편 곳이 영남일보사였다. 그는 거기서 신문 제작을 하는 한편 공군 문인단과 육군 종군작가단의 산파 역할도 하였다. 종군작가단은 수시 일선에 종군하여 국군의 용전하는 모습을 후방에 글로, 강연으로 전하는 한편, 그 피난 북새통에서도 '문학의 밤'을 월례행사로 가져 전시생활 속에서 거칠어져가는 민심의 순화를 꾀했으며, 문인극을 세 번이나 가짐으로써 반공 전쟁의 의의와 후방 국민의 자세를 확립시키는데 응분의 노력을 하였다.
-이승만 독재 투쟁과 민주고발 시절
1952년 전세가 교착상태에 놓이고, 일반 언론기관이 피난지에서나마 제 기능을 발휘하자「승리일보」가 폐간 되고, 구상 시인은 영남일보사의 요청으로 그 신문의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되었다. 구상 시인은 그 신문의 논설과 편집을 맡으면서 두 가지 방침을 세웠는데, 한마디로 하면 친군반독재였다. 즉 반공 전쟁은 수행해야 하고 승리해야하니 군사문제나 그 보도는 적극 협력하기로 하고 민주정치 수호를 하기 위해서는 직필을 들기로 한 것이다. 어떤 때 신문사 자체가 적극적 비판을 가하는 것을 꺼릴 때에는 ‘고현잡화(考現雜話)'라는 개인의 서명 칼럼 란을 설치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곤 하였다. 이래서 신문을 정치적 계엄령이 펼쳐있던 부산에서는 여러 차례 압수를 당하는 수난을 겪었으며, 구상 시인의 집에는 모 기관원이라 사칭하는 자가 권총을 쏘며 침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져 한동안 여기저기 피신해서 자야하는 곤경 속에 있었다. 그리고 저런 글들을 모아 ≪민주고발≫이라는 책제를 붙여 출판하자 판매 금지령이 내려졌었다.
<정계입문 권유를 뿌리치다>
구상 시인은 1959년의 감옥 생활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현실에서 일체 손을 떼고 오직 문학만을 하며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후 그의 결심대로 일체의 사회적 직책을 맡지 않는다. 물론 문학 관련 단체나 각종 시민단체에서 그의 이름에 「고문」이나 「자문위원」이라는 직책을 덧씌우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직책이다.
"문학잡지나 시민단체에 내 이름이 고문 비슷한 직책으로 걸려 있는 게 한 오십 개는 될 거야, 하지만 나는 일체 관여하지를 않아, 관여를 하지 않으니 직책을 받았다고도 할 수 없는 거지, 자유당 말기에 감옥에서 결심한 대로 나는 일체의 직책을 맡지 않았어."
일체의 사회활동을 접은 시인이 그 후 걸은 길은 후학양성을 위한 교수의 길이었다. 그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교직자의 길을 걸었다. 교직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일체의 보직은 사양했으며, 서라벌 예술대학이 설립될 때 초대학장자리도 거절했다. 국민대 설립자인 김성곤 전 공화당의원이 총장자리를 제의할 때도 그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사양했다. 감옥에서 한 결심의 실천이었다. 현실 문제에 대해 활발하게 발언하고 참여했던 시민을 정치권이 내버려 둘리는 없었다. 시인은 정치권에서도 여러 번 함께 일할 것을 제의 받는다. 처음 구상 시인에게 정계 입문을 제의한 사람은 해공 신익회 선생이다. 1950년대 중반 구상 시인의 이름이 「민주고발」사건 등으로 널리 알려졌을 때 해공은 마침 민국당 선전 부장에서 신도성씨의 후임으로 구상 시인을 마음에 두고 권유를 해왔다. 구상 시인은 그 자리에서 거절을 했다. 정치권 입문 권유는 4ㆍ19직후에 다시 찾아왔다. 그때의 권유자는 장면총리(당시 구상 시인은 서강대 국문과 교수로 있으면서 경향 신문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었다)였다. 서강대까지 찾아온 장면 총리는 이미 구상 시인을 경북 칠곡에 민의원 후보로 공천해 놓고 찾아왔다. 구상 시인은 그 길로 평소 안면이 있는 사람이 사단장으로 있는 강원도의 한 부대로 가서 후보 등록 마감일 끝날 때까지 20일간 숨어 있다가 돌아왔다. 장면 총리의 정치 입문 권유는 집요했다. 이번에는 참의원 선거에 나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 구상 시인이 또 택한 것은 도피였다. 제주도에서 당시 승려였던 고은 시인과 40일간을 지내다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으로 정치입문을 권한 이는 박정희 전대통령이다. 5ㆍ16직후 박대통령은 구상시인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으로 내정해 놓고, 경향신문 동경지국으로 나가겠다는 구상 시인을 설득했으나 끝내 박대통령의 요청을 저버리고 동경으로 떠난다. 5공화국 출범할 당시에도 소위 말하는 3허씨가 찾아와 민정당 10인 발기위원으로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구상 시인은 거절했다. 그 후에도 총재 고문이라든가, 전국구 의원 등의 제의가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레이더 사건>
1959년 초봄 국가보안법 파동이 일어나자 야당에서는 그 외곽조직으로 민권수호 국민총연맹이라는 범국민 조직체를 만들어 이에 대처하게 되었다. 구상 시인은 문화부장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그는 집단데모에 앞장서게 되었고, 정치집회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정치의 앞잡이 기관에서는 구상 시인을 노리게 되었는데, 아무리 들춰봐도 법률적 죄과가 없으므로 결국 조작해낸 것이 레이더 사건이었다. 즉 구상 시인과 자주 어울리는 분으로 재일교포 우한용씨가 있었는데, 그가 당시 동경대학에서 바다의 연체동물을 연구하는 사위의 실험용으로 미제 진공관 두 개를 남대문시장으로 사서 보낸 일이 있었고, 그것을 좀더 사 보내라는 기별이 있어 남대문시장의 젊은 상인들에게 선금을 주고 부탁했으나 돈만 떼이고만 사실이 있다. 그런 고충을 들은 구상 시인은 군 수사기관에게 그 돈을 돌려받아 주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인해 구상 시인은 우한용씨랑 젊은 상인들과 함께 이적병기를 북한에 밀송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검찰 측은 구상시인에게 15년을 구형했지만 그해 11월 무죄선고가 내려졌다. 구상 시인은 그때 구형받은 후 피고의 최후 진술에서 "조국에 모반한 죄목을 쓰고 유기형수가 되느니보다 사형이 아니면 무죄를 달라."고 외쳤다. 그 6개월간의 옥중에서 구상 시인은 "수치심이야 말로 인간 최초의 것이요, 본연의 것이요, 인간 구제의 가능성이요, 모든 규범의 시원이다."라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이 인식과 논리는 출옥 후 희곡〈수치〉한 편을 완성하였다.
내가 만일
조국을 팔았다면
그 앞잡이가 되었따면
또 그 손에 놀아났다면
재판장님!
징역이 아니라
사형을 내려 주십시오.
조국을 모반한 치욕을 쓰고
15년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목숨을 구차히 이어 가느니 보다
ㄱ음이 차라리 편합니다.
저기 저 창밖에
일진광풍이 채 물들지도 못한
낙엽을 지움을 좀 보아 주십시오
재판장님!
무죄가 아니면
진정, 사형을 내려주십시오
(1959년 10월 21일, 모과옹두리에도 사연이 47)
<하와이대학 교수 시절>
1970년대∼1974년 : 하와이대학교 극동어문학과 조교수1982년 ∼1983년 : 동대학교 부교수1985년 ∼1986년 : 동대학교 부설 동서 문화 연구소 예우작가
하와이 사생초
나의 바다는 오늘도
태질을 친다
'와이키키' 바다야
너는 가슴을 살랑대는 바람도
나를 송두리째 뒤엎는 태풍도
그 정체를 몰라 그런다.
★
선머슴의 크레용 그림마냥
붉은 고슴도치 해
함박웃음의 달
떠가는 바위구름
색동 무지개
리고 잠자리비행기가
한 하늘에 다 있다
나도 그 아래선
마음 놓고
대낮에 꿈꾸는 짐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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